이욱정 PD: A를 말하고 싶다고, A를 보여줘선 안 된다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를 아시나요? ‘음식으로 보는 인류 문명사’라는 독특한 기획으로 다큐멘터리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피버디peabody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욱정 PD의 인터뷰를 읽으며, 좋은 기획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인상 깊은 문장들을 발췌해서 공유해 봅니다.

➊ A를 말하고 싶다고, A를 보여줘선 안 된다

1998년, 입사 5년차 때에야 비로소 다큐를 연출하게 됐습니다. 주인공은 서울대 의대 기숙사 수위 아저씨. 선배들이 아무도 안 맡겠다고 했어요. 주인공이 죽었거든요.

휴먼 다큐멘터리에는 철칙이 있어요. ‘유명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든, 김구 선생이든 다큐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죽으면 못 만든다.’ 휴먼 다큐멘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의 일상, 감동적인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그때 전 그걸 몰랐어요. 부장이 “할래?” 묻길래 “할게요” 했죠.

제목은 <왕룡사 홀아비의 47년 망향가>라고 달았어요. (중략) 그 분은 유독 남긴 일기와 편지가 많았어요. 본인이 보낸 편지까지 베껴 둘 정도로 기록광이었어요. 생전 한 라디오 출연했던 40초 짜리 인터뷰 녹취도 찾아냈습니다. 문제는 그림이 부족하단 거였죠. 주인공이 죽고 없으니까요.

저는 생전 그 분이 살았던 공간을 그냥 보여줬어요. 서울대학병원 캠퍼스에 있는 오두막. 텅 빈 집, 담쟁이 덩굴 같은 걸 보여줬어요. 그러면 보는 사람이 알아서 상상을 합니다. 빈 공간을 보면서, 여기서 살다간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보는 거죠.

A를 말하고 싶다고해서 A를 보여주는 건 하수예요. 여기 컵이 하나 있네요. 내가 이 컵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럼 굳이 컵이 아니라, 컵이 놓여있던 자리만 보여줘도 보는 사람은 더 큰 걸 상상할 수 있어요.

➋ 좋은 기획이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는 것

<누들로드> 아이디어는 2005년 암스테르담의 스피콜 국제공항에 있는 누들 바noodle bar에서 얻었어요. 일본식 라면을 먹다가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 인종이 섞여 꼬불꼬불한 면발을 건져 먹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국수가 저한테 훅 하고 들어온 순간이었죠.

‘국수를 갖고 더 큰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 바로 수첩을 꺼냈죠. '인류는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면을 먹기 시작했을까?’ 이 물음표가 누들로드의 출발점이 됐습니다.

좋은 기획이란 이렇게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는 것이라 생각해요. 국수 한 그릇에서 문명 탄생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거나, 위대한 인물의 아주 사적인 편지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거죠.

➌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할 것이다'라는 믿음

모든 창작자에게 그런 믿음이 있으면 좋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도 좋아할 것이다’라는. 왜냐면 뭘 하든 남들보다 촉이 발달한, 예민한 사람들이잖아요. <누들로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습니다. 스토리텔링, 영상 표현 방식, 음악까지 전부 다.

<누들로드>로 상을 여럿 받았어요. 하지만 가장 기뻤던 순간은 상 받았을 때가 아니에요. 한 중학생이 ‘<누들로드> 보고 나서 라면을 먹는데, 이 라면이 갑자기 대단해 보였다’고 했을 때. 그때 가장 기뻤어요. 모든 창작자의 기쁨은 어제까지 라면을 라면으로 보면 사람이, 오늘 다른 시선으로 라면을 보게 하는 걸 겁니다. 내가 다른 세상을 선사한 거잖아요.

➍ 창의력은 터치touch에서 나온다

이 세상에는 몸으로 아는 것이 있습니다. 몸 위에 기억을 입히는 행위가 하나의 학습이에요. 창의력은 결국 터치touch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언택트untact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이 이미지만 봐요. 마치 굉장한 인풋input이 들어오는 것 같지만, 보기만 해서는 진짜 내 것이 되지 않아요. 지식과 경험이 결합이 되어야지 내공이 느껴지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이욱정 : 창의성은 터치(touch)에서 나온다, ‘내 것’을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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