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 『질서 너머』, 김한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규칙이 큰 걸림돌이 되어 그 핵심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게 할 때는 규칙을 깨뜨려라

규칙 따르기가 얼마나 엄하게 적용되는지 또는 얼마나 필요한지와 상관없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완고하게 규칙을 따른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

규칙을 충실히 따라서 빛나는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때는 규칙을 따라라. 하지만 그 규칙이 큰 걸림돌이 되어 그 핵심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게 할 때는 규칙을 깨뜨려라.

이 글을 쓰는 중에 나는 아내, 아들, 딸과 함께 토론토의 한 레스토랑에 갔다. 우리가 테이블로 가고 있을 때 젊은 웨이터가 내게 이야기 좀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유튜브 영상을 보고, 팟캐스트를 듣고, 내 책을 읽은 뒤로는 지위가 낮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나 그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떤 기회가 찾아오든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더 성실해지기로 마음먹었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보기로 했다. 청년은 해맑게 활짝 웃으면서, 그 뒤로 6개월 동안 세 번이나 승진했다고 말했다.

더 높은 도덕을 위해 법칙을 깨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 법칙을 철저히 익히고 훈련해서 그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자칫 존재를 압도해버릴지 모를 혼돈 속에서 지각과 행동을 체계화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에는 불만족스러운 출발점과 그보다 나은 종착지가 있어야 한다. 더 나은 종착지가 없으면, 다시 말해 더 높은 가치가 없으면 어떤 것도 판단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와 지루함 속으로 가라앉거나 타락하여 공포·불안·고통으로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가차 없이 변화시킴에 따라 가치 있는 모든 이야기가 현재의 모습과 장소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새롭고 더 완전하면서도 과거의 것과는 달라진 이야기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결국 어떤 이야기의 행위자(그리고 그 줄거리와 인물에 깊이 감동한 사람)는 창조적 변화의 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애초에 그 이야기를 창조했으며, 지금 다시 파괴하고 재창조하려는 것도 그런 변화의 정신이다. 이런 이유로 정신은 도그마를, 진리는 가정을, 마르두크는 고대 신을, 창의성은 사회를, 그리스도는 율법을 영원히 초월한다(용감하지만 계속해서 규칙을 깨는 해리 포터와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법칙 1에서 언급했듯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더 높은 도덕을 위해 법칙을 깨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 법칙을 철저히 익히고 훈련해서 그 필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법칙의 자구字句가 아니라 그 정신에 맞게 법칙을 깨야 한다.

높고 고상하고 심오한 어떤 것을 겨냥하라

높고 고상하고 심오한 어떤 것을 겨냥하라. 그 과정에서 더 좋은 길이 나타나면, 일단 몇 걸음을 걸어본 다음 경로를 바꿔라. 하지만 조심하라. 길을 바꾸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쉽게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땐 방법이 있다. 현재의 길에서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을 배운 뒤에 당신 앞에 놓인 새길이 현재의 길보다 더 어려워 보인다면, 마음을 바꿀 때 당신이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배신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해도 좋다. 이런 식이라면 지그재그로 전진하게 된다. 가장 효율적인 여행 방법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스스로 훈련하면서, 또 필요한 것들을 알아가면서 당신의 목표는 불가피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열심히 추구한다 해도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표적에 눈길을 주지 않으면 명중시킬 수 없다. 표적을 겨누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조준한 뒤 빗맞혔을 때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배움에서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노력해서 성공한다는 말은 어떤 것을 시도하고,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힘겹게 배우고, 다시 목표를 재조정하고, 그런 뒤 ‘진저리가 날 정도로’ 시도하고 실패하고 재조정하고를 반복한다는 의미다. 실패에서 얻은 모든 배움은 때로 당신에게 다른 야망을 가지라고 조언한다(다른 게 더 쉬워서가 아니다. 당신에게 포기하거나 회피하라고 종용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당신이 찾는 것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곳에 없거나, 당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세계에는 숨겨진 위험과 기회가 가득하다. 위험과 마주치기가 두려워 모든 걸 안개 속에 묻어둔다면, 그토록 외면해오던 것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을 때 당신은 이미 다리가 풀려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의식의 밝은 빛으로 흐릿한 안개를 깨끗이 날려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찔리고, 바위에 부딪히고, 안전한 피난처를 지나칠 것이다. 그런 뒤 장애물과 방벽 천지인 미로를 만들었다며 사람을, 현실을, 신을 저주할 것이다. 그때 타락이 손짓하고, 당신은 어둡고 은밀한 동기에 이끌릴 것이다. 그런 동기는 실패를 불씨로 삼고 좌절을 연료로 삼아 점점 더 강해지고 사악해질 것이며, 급기야 그 정점에서 당신은 나쁜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가져갈 만한 것을 모두 가져갔다는 억울한 믿음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런 태도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행동과 무행동은 당신의 삶과 공동체, 당신의 나라와 이 세계를 초라하게 만들고, 그런 뒤 다시 존재 자체를 초라하게 만들 것이다(바로 이것이 어둡고 은밀한 동기가 바라는 결과다).

어렵다는 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직장을 포함해 어느 집단에서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아무도 하지 않는 유용한 일을 찾아서 하라. 동료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라(하지만 당신의 삶을 망가뜨리지는 마라). 위험할 정도로 무질서하다면 체계를 세워라. 근무 시간에 일하는 척하는 대신 제대로 일하라. 마지막으로, 업계 또는 경쟁사들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하라. 그러면 당신은 매우 가치 있는 사람, 핵심 인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의 진가를 알아보고 인정하기 시작할 것이다.

삶을 가장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의미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특별히 불운하지 않다면 사람은 자기가 성취한 것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난 그 일을 해냈어. 정말 유익한 일이었지. 쉽진 않았지만 해낼 가치가 있었어.” 일의 가치와 그 난이도에 상호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생소하고 기이해 보인다면, 다음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려운 일을 원하나요?” “아니요, 쉬운 일을 원합니다.” “당신의 경험에 비춰볼 때 쉬운 일을 하는 게 가치가 있을까요?” “글쎄요, 대개는 그렇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실제로 당신이 원하는 건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나는 다음 문장에 존재의 이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렵다는 건 필요하다는 뜻이다.

독신자 파티에서 최연장자가 되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런 입장이 되면 자포자기의 심정을 멋진 반골 기질로 위장하고 신경질적인 초연함과 오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거기에는 네버랜드 같은 데가 있다. 마찬가지로 목표는 없고 재능만 있는 스물다섯 살 젊은이의 매력적인 잠재성은 서른 살에는 절망적이고 애처로워 보이고, 마흔 살이 되면 완전히 만료된다. 여러분은 자신의 다층적인 잠재성을 희생해 실질적인 알맹이를 확보해야 한다. 목표를 세워라. 자신을 단련하라. 그러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다. 과연 어떤 결과일까? 고통으로 가득하고 의미는 전혀 없는 삶이다. 거기에 지옥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

다시 말해 책임을 질 마음은 없고, 순간적이고 충동적인 쾌락에만 집중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회피가 성공하리라 믿는다면, 당신은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스스로를 속이는 셈이다. 당신의 현명하고 오래된 부분, 당신의 생존을 진지하게 걱정하는 그 부분은 쉽게 속거나 밀려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찌 됐든 사소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얄팍한 전략을 세웠다면, 당신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당신에게 그 일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관심이 충분히 우러나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죄책감과 부끄러움, 초라함을 한꺼번에 안겨줄 것이다.

탐나는 것 열 가지를 놓고 결정을 못한다면 열 가지 모두에게 고문을 당하는 셈이다

내적 통일성이 부족하면 고통이 증가하고 불안이 커지고 동기가 시들고 즐거움이 사라지며, 그 결과 우유부단해지고 뭐든 확신하지 못한다. 탐나는 것 열 가지를 놓고 결정을 못한다면 열 가지 모두에게 고문을 당하는 셈이다. 모순되지 않고 잘 정의된 확실한 목표가 없다면 삶을 가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몰입감은 먼 나라 얘기가 된다. 또한 확실한 목표는 세계를 제한하고 단순화하여 불확실·불안·부끄러움을 줄여주고, 스트레스가 야기하는 소모적인 심리적 요인들을 경감한다. 따라서 허술하게 통합된 사람은 불안정하고 방향이 없는데,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로 인해 무력감과 우울에 빠지면 허무감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또한 심리적 우울 때문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우리 몸은 급속한 노화(체중 증가, 심혈관 질환, 당뇨병, 암, 알츠하이머병)를 겪게 된다.

사회적 결과도 생물적 결과 못지않게 심각하다. 잘 통합되지 않은 사람은 좌절이나 실패의 아주 작은 낌새에도 과잉 반응한다. 그런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타협하지 못하는데, 잠재적인 미래를 논의할 때의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즐겁지 않다. 또한 아주 조그만 반대에 부딪혀도 가던 길을 멈춘다. 전쟁을 벌이는 다수의 하위 인격 가운데 하나가 그런 반대 주장을 물고 늘어지면서 의심이라는 이름으로 최선과 반대되는 행동을 선택한다. 따라서 내적 갈등이 심한 사람은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가슴을 누르는 집게손가락의 압력에도 걸음을 멈추게 된다(그 정도의 장애물은 단박에 걷어찰 수 있는데도 말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으로 남으려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느니 실제로 어떤 것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목표를 세우고 겨냥하라. 이 모든 것이 성숙하기 위한 훈련의 일부이자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 위한 일이다. 목표가 없으면 모든 것에 끌리고 흔들린다. 목표가 없으면 갈 곳이 없고, 할 일이 없으며, 인생에 가치 있는 것이 없다. 가치는 선택지에 위계를 매기고, 낮은 것을 희생하고 높은 것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정말로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를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그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먼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이루고, 그다음에 다음 목표를 세워 또 다른 구체적인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희생이 따를지라도, 그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한 방향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다. 모든 것으로 남으려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느니 실제로 어떤 것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지금 있는 곳을 알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이 가급적 완전한 이야기 형태로 정리되어야 한다

세계를 헤쳐나가려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지금 있는 곳을 알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이 가급적 완전한 이야기 형태로 정리되어야 한다. 당신이 어느 길로 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여기가 어딘지 계산하기 어렵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의 궁극적 이상이 투영되어야 한다. 단순히 어떤 성취나 사랑, 부 또는 권력의 획득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려는 곳에는 행운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높여주고 불운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낮춰주는 성숙한 인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세계를 지도로 나타내는 까닭은 지금 있는 곳(A 지점)에서 가고 있는 곳(B 지점)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 지도를 길잡이 삼아 이동하는 길 위에서 성공과 장애물을 만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로 여기고,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자신의 무대가 펼쳐질 곳),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래야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 튀어오르는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런 설명은 일상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그저 연속된 사건들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 설명 안에는 더 깊은 뭔가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행동을 묘사할 때, 그들이 어떻게 지각하고 평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까지 묘사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이야기가 펼쳐진다(그런 묘사를 잘할수록, 당신의 설명은 더 이야기처럼 들린다).

“내가 쉬운 길을 가도 크게 문제없어”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저주다

태만의 죄를 부추기는 또 다른 동기는 쉬운 길을 가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당신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살아도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진정한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데 나까지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이 떠맡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슬쩍 빠져나오는 게 현명하지 않나?’ 하지만 모든 사람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이득을 주고받으며, 그런 상호작용이 지속될 수 있도록 번갈아가며 책임을 진다. 세 살 때 이런 상호작용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시간을 초월해 꾸준히 이어지는 게임을 할 줄 모르면 우정을 쌓을 수 없다. 친구를 사귀는 능력은 회사에서 좋은 상사, 동료, 부하 직원을 만들 때도 필요하다.

월급을 많이 받지 못한다면 일에서 슬쩍 발을 빼도 괜찮으며, 심지어 그래야 현명하다는 말은 또 어떤가? 이 말에는 존재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함축되어 있다. “내가 쉬운 길을 가도 크게 문제없어”라는 말에서 “크게 문제없어”의 이면에는 나라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는 평가가 녹아 있다. “내가 쉬운 길을 가도”는 스스로에게 내리는 저주다. 만일 당신이 피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해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신뢰하게 되고, 당신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되며, 그로 인해 어려운 일을 더 잘하게 된다. 그럼 상황은 좋아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내팽개쳐둔다면, 당신은 부모가 모든 걸 대신해주는 아이가 되어 인생의 어려움과 도전에 직접 부딪치며 성장하는 능력을 잃는다. “내가 쉬운 길을 가도 크게 문제없어”라는 말은 말하는 사람에게 모험에 끌리는 요소가 전혀 없을 때만 참이다. 게다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자신의 운명을 피해 뒤로 물러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쉬운 길 대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로웠을 테니 말이다.

사랑에 대하여

연륜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심각한 하자가 하나쯤 있다는 걸 안다. 반면에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어딘가에 완벽한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다. 심지어 당신은 그 완벽하다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콩깍지가 씌여 어리석고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어리석은 것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투사한 완벽한 상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랑의 진짜 대상이 누구인지 매우 혼란스럽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완벽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가정이다. 이 두 가정 때문에 당신은 낭만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 가정이 둘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한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상대방의 한계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 이는 이해할 가치가 매우 높은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할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계속 감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아주 어두운 곳이고, 모든 사람의 영혼에는 검은 성분이 들어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실재하는 것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독특하게 섞여 있는 것을 본다. 우리가 신뢰와 사랑에 기초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때 그 가능성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가 용기를 낸다면 상대방의 한계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심연과 어둠의 해독제를 발견할 수 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감사하라.

사랑하는 아들에게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면 겁쟁이처럼 두려움에 떨며 비굴해지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딸에게 세상은 속임수로 돌아가니 편법을 적극 사용하는 걸 높이 사고 본받으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다. 또한 자신이 아끼는 이에게 아픔, 고통, 상해, 재앙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과 적의로 세상의 존재들을 대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인간은 선한 길과 악한 길의 차이를 알고 있으며(의식적으로 저항하고 거만한 주장을 늘어놓긴 해도) 선과 악의 존재를 믿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창조한 것이 보기에 좋았다는 신의 말에는 그분의 창조 행위에 진리, 용기, 사랑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는 보편적 윤리가 함축되어 있다. 창조 행위(신의 창조든 인간의 창조든)를 통해 가능성의 영역에서 출현하는 모든 것은, 그 창조의 동기가 좋은 한에서는 반드시 좋다. 나는 모든 철학과 종교를 살펴봐도 다음 주장보다 더 대범한 주장은 없다고 믿는다. “믿고 행동하라.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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