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의 사생활

박찬용, 『잡지의 사생활』, 세이지

그저 지난 호보다는 나은 페이지를 만들려 노력한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기분을 느꼈다. 아주 슬펐던 때도 있고 짜릿했던 때도 있었다. 잡지 에디터를 하고 싶다는 생각부터가 실수였다고 생각한 적도, 내가 그래도 이 맛에 이 일을 하는구나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으로 최대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내가 훌륭한 에디터라거나 유명한 에디터가 아닌 건 잘 알고 있다. 그저 지난 호보다는 나은 페이지를 만들려 노력한다. 그 정도면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라이프스타일 잡지 업계를 벗어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물건이 다 뭔가, 취향이 다 뭔가, 물건의 보드라움만 따라다닌 지난 몇 년 동안 나에게 남은 게 뭐가 있나, 이런 허무가 새벽의 한기처럼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고민이 길어지자 좋은 잡지사에 다니고 있으면서 앞날 계획도 없이 그만뒀다. 그때까지 모으고 있던 빈티지 붐박스를 다 버렸다. 엄마가 표현한 돈 주고 산 쓰레기가 그 붐박스였다. 실제로 모양만 보고 사서 작동이 안 되던 것도 많았지만 그 물건에는 성능 이상의 멋이 있었다. 80년대 물건다운 튼튼함과 견고함, 거기 더해 디자인 전반에 뭔지 모를 낙관이 있었다. 그걸 다 버렸다.

마음이 약해지면 남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남들은 다 그럴듯한 것, 멋있는 것, 나는 못하는 것을 잘만 하고 있는데 나만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빙글빙글 도는 데에만 기력을 다 날려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체력도 약한데. 그때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

뭘 하고 싶은지 선명한 상을 그리는 것도 노력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일은 나에게 아주 큰 교훈이 되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던 걸 잊어버릴 수도 있구나,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선명한 상을 그리는 것도 노력해야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아주 열심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장은 할 수 없다고 해도, 어쩌면 이 도시에서 나의 역량으로는 평생 하지 못할 일이라고 해도. 그때 편집장의 말씀이야 나를 달래려던 것이었겠지만 만약 정말 물리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무말도 못 한다면? 좋은 기회 앞에서 멍하니 있다가 기회를 놓치고 만다면? 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미디어와 크리에이터들은 차별화가 필요해지고, 결국 컨설팅과 큐레이션이 필요하니까요

우리 세대는 사람들 앞에 설 때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는데, 젊은 세대는 그런 각오마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네요.

본인이 브랜드를 만들 수도 있어요. 브랜드의 컨설턴트를 할 수도 있고, 유튜버가 될 수도 있어요. 패션 에디터를 하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1인 미디어의 홍수 시대이지만, 저는 패션 에디터는 계속 필요한 직업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미디어와 크리에이터들은 차별화가 필요해지고, 결국 컨설팅과 큐레이션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포털이나 SNS 회사, 브랜드나 방송사에서 미디어 전문가, 다시 말해 에디터를 영입하고 있어요. 에디터는 매니저이자 크리에이터이자 오퍼레이터잖아요. 이런 일을 한 번에 겪을 수 있는 직업은 패션 에디터 말고는 없을 거예요.

〈보그 코리아〉 패션 에디터 홍국화는 현대 사회의 패션 에디터가 어떤 직업인지에 대해 아주 소상히 들려주었다. 직업에 대한 높은 몰입도와 프로의식, 뭔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걸 만들어보고 싶어서 피로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는 패션보다 더 멋지다. 패션 콘텐츠 에디팅이라는 직업을 대하는 홍국화의 태도는 특정 직업을 넘어 지금 시대의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특히 홍국화는 인터뷰가 끝나고 원고가 만들어진 후에도 본인이 원고를 거듭 확인하며 인터뷰 원고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아울러 〈보그〉의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로 직접 원고를 검토해주신 신광호 편집장께도 깊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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