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만드는 법

이연실, 『에세이 만드는 법』, 유유

내가 편집하면서 늘 최종적인 독자로 가정하는 대중이란 지극히 보통의 취향과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중’이라는 말에 불편과 반감을 느끼는 분도 있을 것이다. 흔히 대중문화나 트렌드 속에서 대중은 갈대처럼 유행과 미디어에 휘둘리고 다소 경박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내가 편집하면서 늘 최종적인 독자로 가정하는 대중이란 지극히 보통의 취향과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다. 숙련된 독자가 아닌 사람, 책을 반드시 읽지 않아도 살 수 있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 심오한 지식과 미학보다는 즉각적인 재미와 감동·위로가 당장 필요한 사람, 책값 15,000원을 낼 형편은 되지만 책보다 재밌는 것도 많고 돈 쓸 데도 많아서 서점에서 지갑을 여는 데는 제법 깐깐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모든 출판인과 작가 들은 철저히 숙련된 독자에 속하므로, 이들 평범한 대중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아주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직 일에 자존심을 건 사람만이 화를 낸다

오직 일에 자존심을 건 사람만이 화를 낸다.

일에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뒤에서 짜증내고 투덜거리고 빈정거릴지언정 화내지 않는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내가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라 생각하며, 일에 자기 자신을 걸지 않는 사람은 일할 때 감정 소모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화내는 디자이너, 화내는 마케터, 화내는 작가, 당장은 까다롭고 불편한 이야기일지라도 길게 보면 서로의 작업을 위해 확실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까놓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줄곧 좋아했다.

책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나이테처럼 천천히 쌓아 가며 살아 온 유명인의 책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자기 인지도와 커리어의 ‘부록’처럼 만들고자 하는 유명인과의 작업에는 쉽게 동하지 않는 편이다. 자기 본업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할지라도 책 작업을 할 때는 철저히 작가가 되는 사람이 좋다. 글을 유려하게 잘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책에 대한 책임감과 기대와 무게감을 가지고 충분한 시간을 투여해 원고 작업을 할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찾고 기다린다는 말이다. 자신이 이만큼 유명하니 출판사에서 알아서 멀끔한 책으로 만들어 주겠거니 바라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의 책은 결과적으로 잘되지도 않거니와, 작가 자신과 편집자, 결국은 독자에게까지 독이 된다.

‘나도 이만큼 유명해졌으니 남들처럼 책 한번 내 볼까’ 하는 즉흥적인 충동이 아니라,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마음에 품고서, 책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나이테처럼 천천히 쌓아 가며 살아 온 유명인의 책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나는 독자는 그런 유명인의 책을 알아보고 정직하게 반응한다고 믿는다.

유명인의 인기와 커리어의 부침에 따라 갈대처럼 판매량이 흔들리는 책이 아니라, 책 그 자체로 온전한 읽을거리가 되는 에세이를 나는 기획하고 싶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차트처럼 반짝 베스트셀러 차트에 이름을 올렸다가, 석 달도 못 되어 썰물처럼 독자가 빠져나가는 수명 짧은 책이 아니라, 우직하게 독자를 늘려 나가고 서점에서 오래 독자를 만나는 유명인의 책을 나는 기획하고 싶다.

이런 책은 그 유명인의 가장 빛나는 날에도, 이따금 좋지 않은 시절에도 그의 삶과 성취에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주고 지지대가 되어 준다. 저자의 유명세에만 기댄 게으른 기획의 에세이는 그의 팬만을 타깃으로 삼았다가 팬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특별한 얘기는 없더라며 볼멘소리가 나오기 일쑤이지만, 고민을 거듭한 기획과 단단한 집필에서 나온 에세이는 호기심으로 심상하게 책을 집어 들었던 일반 독자까지도 그의 팬으로 끌어들인다.

분명한 관점과 주제가 있는 기획과 인터뷰가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주인공으로 만드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영심이 마음을 유지하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살다 보면 시들하고 재미없는 세상인 것 같아도, 우리 주변엔 열광할 만한 재미있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다. 그리고 이 온갖 분야의 재미있는 사람들과 화제를 한 권으로 편집해서 보여 주는 놀라운 장르의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잡지’다. 나는 다음 생의 꿈이 매거진 에디터일 정도로 잡지 읽는 것을 좋아한다. 『컨셉진』, 『보스토크』, 『씨네21』, 『채널예스』, 『톱클래스』 등의 매거진은 빼놓지 않고 보려 애쓴다.

컨셉진』은 매호 주목받는 유명인이나 스타를 내세우기보다, 해당 호의 주제에 맞는 일반인을 기막히게 섭외해 그 호의 스타로 빛나게 한다. 분명한 관점과 주제가 있는 기획과 인터뷰가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주인공으로 만드는지를 보여 준다.

슬픔을 배경으로 두고 자신을 내세우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

전작이 좋았다고 해서 다른 책도 무조건 좋으리란 법은 없기에, 원서를 받고 매우 꼼꼼하다는 번역가 선생님께 검토를 맡겼다. 그런데 며칠도 안 돼 대뜸 전화가 걸려 왔다. 원고에 문제가 있는 걸까 긴장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엄청나게 흥분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런 걸작이 아직까지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너무나 압도적인 작품이라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 몸에 통증이 올 정도이니, 이 작품은 꼭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되게끔 좋은 문장으로 옮기겠다고. 나도 좋은 작품을 만나면 수시로 흥분하고 열변을 토하기 일쑤이지만, 그때 걸려 온 전화 속 음성은 잊을 수가 없다. 이렇듯 세상 어딘가엔 분명히 있다. 나의 막연한 감과 호기심을 확신으로 바꿔 주는 사람들, 내가 못 읽는 언어, 내가 완전하게 할 수 없는 부분까지 채워 주는 사람들이.

내가 좀더 눈여겨보는 곳은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으로 화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개인들의 SNS다. SNS를 둘러보면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그림으로 대신 말하는 일반인이 많다. 신진 화가와 고전 화가, 국내 작품과 해외 작품을 아울러 아름다운 이미지와 미술, 사진 작품을 차곡차곡 포스팅하는 그 ‘미술 친구’들은 나처럼 어떻게 미술의 세계로 들어서야 할지 알지 못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친절한 길잡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작가님이 방한하셨을 때, 기념사진 스폿인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멀리 배경으로 걸고 사진을 찍어 드리려 했지만, 근처에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계신 모습을 보고는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그분들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진 않겠다고 하셨을 때 느낀 뭉클함. 언어를 초월해 진심이 느껴지던, 슬픔을 배경으로 두고 자신을 내세우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거장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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