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쁨

유병욱, 『생각의 기쁨』, 북하우스

누군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콘텐츠는 곧 그 사람(창작자)의 총체일 테니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인생에서 만난 ‘누구’가 반드시 사람인 것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누구는 책이기도,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만화 『슬램덩크』이기도, 겸재 정선이기도, 보티첼리의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누군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든 콘텐츠는 곧 그 사람(창작자)의 총체일 테니까요. 그렇게 저는 고등학생 때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를 만나고, 2년 차 카피라이터일 때 겸재 정선을 만났던 겁니다. 저란 사람의 ‘생각의 인생’을 바꾼 몇 번의 만남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어릴 적 사냥하듯 읽은 책들을 나이가 들어 다시 읽고는, 내가 읽었던 그 책이 이렇게 좋은 책이었나 싶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수학여행 때 갔던 여행지를 다시 가 보고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열일곱의 난 대체 무얼 보고 돌아왔나 싶던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흘려 듣던 유행가도 실연당하고 난 뒤에 들으면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는 법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으면, 만남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경우가 이렇죠.

기교는 결코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배운 것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명백한 진실 하나가 남았습니다. ‘빨리 배운 것은 빨리 사라진다.’ 시간을 들여 오래 고민했던 것들, 몇 달을 끌어안고 살았던 생각들, 그저 좋아서 빠져들고 다듬고 연마했던 것들은 결국 나를 이루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됩니다. 하지만 테스트의 순간을 통과하기 위해 ‘단기간에 완성’한 것들은, 잠시 나를 멋져 보이게 만들어줄 순 있었으나 단기간에 사라지더군요. 기교는 결코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경험과 관이 곧 당신의 창작물이 된다. 당신을 깎아 또 다른 당신을 세운다.

당신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 생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경험과 관觀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루키의 이론을 빌리자면, 그 경험과 관이 곧 당신의 창작물(또는 생각의 결과물)이 되니까요. 말하자면, 당신을 깎아 또 다른 당신을 세우는 겁니다. 그러니 경험의 폭은 넓을수록 좋고, 생각은 깊을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관인데요.

‘나는 미디어가 될 만큼 거창한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의 생각을 외부에 발신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미디어입니다. 요즘 같은 SNS의 시대엔 더더욱 그러하죠. 만화를 그리든, 책을 만들든, 블로그를 운영하든, 카피를 쓰든, 디자인을 하든, 필름을 찍든, 마케팅을 하든, 앱을 만들든, 당신은 하나의 미디어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당신의 생각과 경험과 가치관이 곧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하루키의 굴튀김이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있으니까요.

많은 이들이 깊이 사랑하는 콘텐츠에는 대체로 여백이 있습니다

빈틈에는 중력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말 없는 자는 상대를 수다쟁이로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을 많이 하면, 내 말이 끼어들 틈이 없죠. 상대가 과묵하면(하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호를 주면) 나도 모르게 그 틈을 메우려 들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콘텐츠든 수신자로 하여금 들어올 여지를 주면, 나도 모르게 개입하고 싶어지고, 일단 개입이 시작되면, 그것에 대한 관심도 달라집니다. 어떤 영화가, 노래가, 소설이, ‘저건 내 얘기야’가 되니까요.

많은 이들이 깊이 사랑하는 콘텐츠에는 대체로 여백이 있습니다. 보는 이가 끼어들 틈이 있습니다. 그 틈에 자기를 집어넣고 그 노래, 영화, 그림을 자신만의 버전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죠.

매력을 만들어내는 방법

매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생각하기에 따라 이렇게 단순하기도 합니다. 반대 방향에 찍힌 하나의 점이죠. 그러니 아이디어가 마음처럼 나오지 않는 날이면 이런 방법을 써보는 건 어떨까요? 그 영역에서 모두가 하는 방식을 적어보고, 패턴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딱 하나만 반대편에 점을 찍는 겁니다. 남들이 다 하는 것에서 딱 한 포인트를 반대 방향으로.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또 참 쉬운 일입니다. 고백하자면, 아이디어 회의를 몇 시간 앞둔 저를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고마운 팁입니다.

옥탑방 작업실

회사 동료 중에 흥미로운 사례가 있습니다. 광고 디자이너이면서 아이 엄마이기도 한 이지윤 아트 디렉터 이야기인데요. 일하랴 육아하랴 양쪽을 오가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그녀는,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라 집값이 싼 동네의 옥탑방을 하나 구했다고 합니다. 언덕배기의 옥탑이라 가격은 저렴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눈앞이 탁 트인 곳. 그녀는 이 공간을 작업실로 꾸며서 시간이 날 때마다 들른다고 합니다.

그곳에 들르는 날은 온전히 쉬는 날. 그곳에서 그녀는 개인 작업도 하고, 가끔은 친구들을 불러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저렴한 월세로도 이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녀는 거듭,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죠.) 옆 팀 사람들이 그 작업실에서 송년 파티를 한 사진을 보니, 멀리 한강도 내려다보이더군요. 아마 그곳이 그녀가 가끔 숨는 동굴이겠죠.

넓게 배우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간략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 이 말은 분명 스티브 잡스가 했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말의 원전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한 말이었습니다. 21세기에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 가슴에 품은 문장은, 15세기를 살았던 거장의 입에서 나왔던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600년 전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다니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저 문장과 정말 비슷한 글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시절보다 2천년 전의 동양에서도 발견된다는 겁니다. 노자의 『도덕경』 속에 등장하는 ’大巧若拙’이 그것입니다.

대교약졸.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처음 접한 뒤, 포스트잇에 적어 늘 제 컴퓨터 옆에 붙여두었던 문구입니다.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죠. 가장 훌륭한 어떤 것은 기교 없이 담백하고 단순하다는 겁니다. 스티브 잡스의 문장과는 시간적으로 2500년 이상 떨어진 이야기죠. 대가가 되면 결국 비슷한 진리에 닿는가 봅니다. 그리고 저는, 맹자에게서도 비슷한 문장을 봅니다. (이쯤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스티브 잡스에 대해선 조금 알지 몰라도, 노자나 맹자에 대해선 전혀 해박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글 저 글 속에서 저 문장들을 발견하고, 수집하다가, 약간의 연관성을 발견한 것뿐임을 알려드립니다.)

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 (박학이상설지 장이반설약야)
넓게 배우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간략히 설명하기 위함이다.

좋으면 박수를 받고, 별로일 땐 침묵을 견뎌야 합니다

생각하는 일은, 매력적인 일입니다. 생각은 성별이나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예로 들어볼까요? 광고회사는 대체로 다른 조직보다 민주적이라거나, ‘꼰대’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평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가의 기준이 선명하기 때문일 겁니다. 회의 시간에 던지는 말 한 마디, 카피라이터가 내놓은 카피 한 줄에는 직급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좋으면 박수를 받고, 별로일 땐 침묵을 견뎌야 합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경력 뒤로 숨을 수 있는 기회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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