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각성: 삶의 주도권을 가지려면 자동화의 격랑 속에서 생산의 주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다른 이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영화 〈아이, 로봇〉의 똑같이 생긴 기계들이 아니라 만화 〈스머프〉처럼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각자 다른 역할을 하는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 말입니다. 전체의 일부인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죠.
아이덴티티는 항구적인 인간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바깥 활동이 제약되고 혼자 있어서일까요, 최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정체성 내지는 자존, 자신감을 ‘관계’에서 풀었습니다. 어느 회사의 김 대리라는 식이죠. 그런데 이제는 관계로 풀 수 없으니 반대로 나 자신에게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외부적인 형태의 누구 아들딸, 김 대리 같은 게 아니라 ‘너 누구니?’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는 거죠.
이처럼 방법은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플랫폼을 만들거나 장인이 되는 것. 즉 프로바이더가 되거나 크리에이터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1등이 되어야 하고요. 가운데는 없어요. 결국 이 이야기의 무섭고도 슬픈 결말은, 우리가 완전체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베블런은 1899년에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는 용어를 제안했습니다. 자본소득이 높아 노동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지금부터 유한계급이라 부르자는 거였죠. 이들은 노동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의 여유를 더 많이 표현할 것인지가 무척 중요한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유한함을 표현하기 위해 쓸모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지금은 ‘포스트 베블런’을 말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벨레짜Silvia Bellezza 교수는 과거에는 여가와 사치가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일하는 게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말합니다. 자동화, 무인화 때문에 일반적인 업무는 인간이 낄 틈이 없으니 바쁘게 일하는 삶이 오히려 나의 훌륭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아티스트, 장인, 나아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을 테고, 나머지 대중은 기회가 없을 수 있으니까요.
-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북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