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심각한 하자가 하나쯤 있다는 걸 안다. 반면에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어딘가에 완벽한 사람이 있다는 가정이다. 심지어 당신은 그 완벽하다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콩깍지가 씌여 어리석고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어리석은 것은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당신이 투사한 완벽한 상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랑의 진짜 대상이 누구인지 매우 혼란스럽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완벽한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가정이다. 이 두 가정 때문에 당신은 낭만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실패한다. 가정이 둘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한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상대방의 한계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도 있다. 이는 이해할 가치가 매우 높은 말이다. 이 말을 이해할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계속 감사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아주 어두운 곳이고, 모든 사람의 영혼에는 검은 성분이 들어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실재하는 것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독특하게 섞여 있는 것을 본다. 우리가 신뢰와 사랑에 기초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할 때 그 가능성은 정말로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가 용기를 낸다면 상대방의 한계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우리는 심연과 어둠의 해독제를 발견할 수 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감사하라.
사랑하는 아들에게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면 겁쟁이처럼 두려움에 떨며 비굴해지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딸에게 세상은 속임수로 돌아가니 편법을 적극 사용하는 걸 높이 사고 본받으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다. 또한 자신이 아끼는 이에게 아픔, 고통, 상해, 재앙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과 적의로 세상의 존재들을 대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인간은 선한 길과 악한 길의 차이를 알고 있으며(의식적으로 저항하고 거만한 주장을 늘어놓긴 해도) 선과 악의 존재를 믿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창조한 것이 보기에 좋았다는 신의 말에는 그분의 창조 행위에 진리, 용기, 사랑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는 보편적 윤리가 함축되어 있다. 창조 행위(신의 창조든 인간의 창조든)를 통해 가능성의 영역에서 출현하는 모든 것은, 그 창조의 동기가 좋은 한에서는 반드시 좋다. 나는 모든 철학과 종교를 살펴봐도 다음 주장보다 더 대범한 주장은 없다고 믿는다. “믿고 행동하라.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조던 피터슨, 『질서 너머』, 김한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